피렌체를 떠나 토리노로 간다고 하자 사람들이 “사업차 가는 것이냐”고 묻는다. 여행이 일의 일부이니 사업이 맞긴 하다. 과연 토리노는 뜨내기가 별로 없는 조용한 도시이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자동차 피아트와 알파 로메오, 란치아의 본사가 토리노에 있다. 그런 경제력과 알프스를 배경으로 2006년 동계올림픽도 치렀다. 월드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이탈리아 유벤투스 축구팀에 온 뒤로 유벤투스와 토리노의 경기를 보러 오는 한국인 관광객도 느는 추세라고 한다. 토리노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가보자.로마제국이 멸망한 이래 이탈리아는 여러
문화에 기대어 먹고사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이다. 이탈리아는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문화로 먹고사는 이 나라가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전에 전성기를 보낸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전철을 밟을지, 중국처럼 새로운 도약을 할지 잘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지정학적으로 이탈리아가 다시 고대 로마 같은 패권국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진앙(震央)이 됐던 천재적 창의는 적어도 아직 유효하다고 본다.올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서거 500주기이다.
주간조선 2540호에서 2019년에 주목할 클래식 무대를 조명하며, 네덜란드바흐협회(Netherlands Bach Society)가 진행 중인 ‘올 오브 바흐 (All of Bach)’라는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오는 2021년까지 바흐의 전곡을 연주하고, 그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하는 대장정이다. 주위에서 질문을 많이 받았다. 네덜란드에서 한다면 믿을 만한 수준인가? 전곡이라면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왜 바흐인가?작년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의 탄생 333주년이었다. 특별한 숫자긴 하지만 딱히 전례는 없다. 이런 식
몇 년 전 한 일간지 기자가 내게 문의한 적이 있다. 음악계에서 작곡가의 생몰연도를 헤아려 기념하는 관습이 언제 시작되었냐는 것이다.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당장 생각난 것은 모차르트를 숭배했던 신학자 카를 바르트가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1956년에 쓴 편지였다. 바르트는 자신이 천국에 간다면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나 칼뱅, 슐라이어마허보다 먼저 모차르트를 만나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열렬한 모차르트 예찬자였다. 그보다 앞서 1927년 베토벤 사후 100주기 때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각종 공연과 출판, 영
교실에서 다른 친구들이 모두 퀸과 아바, 또는 특이하게 잉베이 말름스텐(당시는 잉위 맘스틴이라고 불렀다)과 같은 자극적인 음악에 열광하던 1980년대 말, 나는 보수적으로 클래식 음악에 몰두한 외톨이였다. 30년이 지난 지금, 흥행기록을 써가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열풍에 힘입어 퀸의 팬이랄 수도 없는 나까지 이런 글을 쓰는 것을 보니 어느덧 그들도 ‘클래식’이 된 모양이다.당시 친구가 귀에 꽂아준 ‘보헤미안 랩소디’(이하 프레디 머큐리와 브라이언 메이가 부른 대로 ‘보랩’이라 줄임)는 그에게는 경천동지할 새로운 음악으로 비쳤
독일 중동부 라이프치히에서 남부의 뮌헨까지는 3시간 남짓 걸린다. 나는 뮌헨 조금 더 아래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까지 내려간다.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가 있는 알프스 지방이다. 엄청나게 긴 이곳 지명은 히틀러가 동계올림픽 개최를 위해 두 마을을 하나로 합친 데서 비롯되었다.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은 겨울에는 스키를, 여름에는 하이킹을 즐기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처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나러 오는 사람은 훨씬 적다. 슈트라우스는 말러와 같은 연배이다. 그러나 말러가 제1차 세
함부르크를 떠나 1시간 반 남짓 남동쪽으로 내려가 독일 수도 베를린에 도착했다. 10월 3일은 우리에겐 개천절이지만 독일은 통일을 이룬 날로 기린다. 그러나 베를린 중앙역 안팎의 인파는 심상치 않았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친난민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모여 있다.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이 ‘관용’이라고 적힌 푯말을 들고 대치 중이다. 이들 사이사이 무장경찰 몇 개 중대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베를린은 독일에서도 특히 이민자에 대한 관용을 상징하는 도시이다. 17세기 말 브란덴부르크 선
독일이 경쟁국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비해 높은 음악 수준에 도달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17세기 30년전쟁 이래 나라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잘게 쪼개졌던 덕이다. 300개가 넘는 공국이 저마다 궁정악단을 꾸리면서 음악가들이 더 나은 조건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고 서로 경쟁했기 때문이다. 도제와 일꾼, 장인(마이스터)의 수직적인 시스템이 가장 잘 돌아갔던 나라가 독일이었고, 음악가도 그런 틀을 따랐다.이런 틀 속에 있던 음악가들의 복잡한 계보를 한번 훑어보자. 1721년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이라는 작곡가가 함부르크에 음
기승전, 다음은 ‘여행’이라는 시대이다. 대형서점 여행 코너는 늘 사람이 북적인다. TV채널마다 해외여행 프로그램이 줄을 잇고, 명절이면 공항이 북새통이다. 이쯤되면 여권에 아시아 여러 나라 도장이 찍혀 있고, 더 이상 패키지 여행은 성에 차지 않는다. 그저 좋은 경치 보고, 맛있는 음식 먹는 것 말고, 뭔가 마음을 채워줄, 그리고 돌아와도 허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삶에 최선을 다하게 해줄 여행이 필요하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번 독일행도 많은 물음표를 안고 떠났다. 20일 남짓한 나의 여정도 물음표꼴로 생겼다.